3월입니다.
2월을 며칠 남겨두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오늘은 햇살은 맑지만 아직은 날이 많이 찹니다.
며칠 전 남편이 마당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오일장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남편 눈에 장꾼의 손에 들린 전동전지가위가 보였나 봅니다.
덕분에 매년 힘으로 해오던 일을 크게 힘 안 들이고 반나절 만에 전지를 다 했습니다.
잘린 가지들을 주워 모으다보니 산수유와 명자나무 등은 벌써 꽃봉오리들을 달고 있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오는 게 눈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 바람재 카페에 정가네님이 손녀와 함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은 이야기를 올리셨습니다.
초등 1학년인 이쁜 손녀는 그 책을 읽고는 “뭔 책이 이렇게 슬퍼요?”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지요.
그 글을 읽고 생각했습니다.
‘암탉의 이름도 줄거리도 완전 낯이 서네.
아마 너무 유명한 책이라서 어느 순간 안 읽고도 읽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도립도서관 가는 길에 어린이 열람실에 들러 빌려왔습니다.
군데군데 눈물까지 글썽이며 읽고선 정말 안 읽었음을 확인했지요.
그리곤 습관대로 독서 공책에 간단히 몇 자 적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이 마음에 짠하게 들어왔지요.
‘나는 괜찮아. 아주 많은 걸 기억하고 있어서 외롭지 않을 거야.’
그 며칠 후 다시 독서공책을 펼치다가 우연히 앞장을 열었습니다.
카페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손글씨를 쓰는 일이 많이 줄어 아주 오래 전에 시작한 공책이지요.
오랜만에 보니 더러더러 읽었다고 적어둔 책 제목도, 옮겨놓은 문장들도 생경스러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햇살이 목이 메이도록 화창한 날입니다.’
(최명희 문학관을 다녀와서 옮겨 놓은 문장이라고...
작가의 생생한 표현에 오히려 목이 메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지음, 사계절 펴냄)’
공책을 넘기다보니 딱 이렇게 적힌 페이지가 나온 것입니다.
2010년 1월에 읽었다고 이리 적혀 있다니...
11년 전이라고 해도 어쩜 그렇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을 뿐더러 완전히 낯설 수가 있을까요?
이번에 읽을 때 ‘많은 걸 기억하고 있어서 외롭지 않을 거야.’ 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 왔었는데
전 반대로 많은 걸 까먹어가고 있나 봅니다.
황당해서 혼자 웃었지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엔 아들이 퇴근길에 전화하면서 다음날 1시간 일찍 출근할 일이 있다고 엄마가 깨면 모닝콜 함 해달라고 했지요.
그 이야기 끝에 다른 이야기까지 실컷 주고받은 덕분에 깨워달란 말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다행히 제때 일어나서 ‘열일 중’이라고 해서 웃었지만요.
그러고보니 더 황당했던 일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간 중국 운남성의 푸타춰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서너 시간의 자유시간 끝에 거의 마지막으로 셔틀버스를 타고서도 우린 떠들고 웃느라 바빴지요.
그런데 그 순간 일행 중 세 자매가 온 팀의 막내가 혼자서 급하게 올라타더니 "우리 언니 봤나요?" 라고 묻곤
"아뇨."란 말에 다시 버스를 내렸다고 했지요(?).
우리가 꼴찌로 전용버스로 돌아오니 막내 혼자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다들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함께 걱정을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그 세 자매가 우리를, 그것도 특히나 저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아까 그 셔틀버스에서 막내가 우리를 만난 후 언니들을 찾으러 도로 내렸는데도 보았다는 말을 안 했냐구요.
그제서야 우린 그 순간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맞아, 뭔가가 우리를 스쳐 지나가긴 한 것 같아." 라고...
그런데 정작 그 단말마같은 대답을 해주었다는 저는 아무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고의가 아니라 우리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났다고 사과 아닌 사과를 했지요.
얼마나 깔깔대느라 그랬을까 하고 즐거운 에피소드로 남아있지만 사실은 이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그땐 옆의 두 친구도 기억을 못 했으니 덜 황당했지요.
이제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았거나, 머리에 한 번 더 각인시키지 않은 일은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네요.
이러다 누군가 들려준 우스개 이야기처럼 어느 날 애국가를 들으며 “어? 우리 학교 교가네!” 라고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읽은 것, 공부한 것을 다 기억할 수도 없고, 더러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또 좀 더 따뜻하고 넓은 마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따뜻한 봄이 오고 있습니다.
미세 먼지 없이 목이 메일만큼 화창한 봄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3월 초하루에 가을하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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