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재들꽃 카페 초하루꽃편지

2021년 새해 첫달 초하루꽃편지 - 고마운 사람들

가 을 하늘 2020. 12. 31. 22:15

2021년입니다.

새해에는 코로나가 진압되고 많은 것이 바로잡혀서 유난히 힘든 시간을 지낸 우리 모두에게 평화로운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도 갈 수가 없고,

멀리 있는 아들도, 친구도 쉬이 만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자주 가던 가까운 동네식당의 외식도 겁나서 망설여집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지구 위의 인류 모두가 힘든 긴 날들이 지나가고 있지요.

 

텀블러에 뜨거운 현미차를 담아 마시다가 텀블러를 선물해 주신 수녀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만남이 많지 않았던 이 한 해도 지나온 길목마다 힘이 되고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올해 제일 큰 일이 발 수술이었지요.

이 수술을 선뜻 할 수 있게 된 건 ㅇㅅ씨 덕분입니다.

남편의 장기출장을 따라와 몇 달을 우리 동네에서 살게 된,

그래서 산책길에 우리집 마당 구경을 하러 들어와 걷기 좋아하는 저와 친구가 된 밝은 사람이지요.

발이 불편해도 참고 걷던 나를 안 된다고 강권해서 병원까지 같이 가주고,

서울 가서 수술하면 서울 자기 집에서 통원 치료를 다니라고까지 말을 해 준 그 친구 덕분에 수술 엄두를 내었지요.

다행히 포항에서 내과의로 일하는 막내 동생 덕분에 유쾌하고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뼈를 깎는 아픈 수술 덕분에 얻은 것도 많지요.

일 있어야 전화했던 남동생 부부와도 속내를 나눌 수 있었고

아프고 힘든 시간을 덜어주려고 매일 전화해 주던 친구와는 이제 톡보다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지요.

입원실에서 만난 ㅎㅁ씨와 ㅁㅇ씨도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지...

옆 침대의 ㅎㅁ씨는 내가 아파 끙끙댈 때마다 발딱발딱 일어나 들여다봐 주고,

맞은편의 ㅁㅇ씨는 화상 치료의 끔찍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병실의 씩씩한 반장 역으로 모두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발을 이래 가지고도 예년처럼 김장을 했습니다.

혼자 하는 첫 김장을 앞두고 끙끙 댈 때 쉽고도 맛있는 김장 비법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지요.

올해도 고맙단 생각을 하며 맛있게 육수 끓여 양념을 준비했습니다.

절이고 버무리는 건 우리 동네 ㅅㅇ엄마와 위의 동네친구 ㅇㅅ씨가 해주었지요.

도와달란 소릴 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 감사했습니다.

 

수녀님 두 분도 올해 저를 채워주신 분들이지요.

올 초 성당 독서모임을 만들어 맡겨주신 ㅇㄱㄷ수녀님 덕분에 갇혀 지내는 시간에도 의미있는 일을 하는 착각을 하고 지냈습니다.

코로나와 발 수술로 수업도 얼마 못 했는데 손수 만드신 레몬차와 책과 텀블러를 선물해 주신 야간학교 ㅈㅁ수녀님을 만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친구도 레몬차를 만들었다고 가져다 주어서 레몬차에 맛들인 저는 내년엔 꼭 만들려고 하지요.

 

또 독서모임에서 제일 열심인 ㅇㅈㄹ는 어느 순간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귀한 사람입니다.

무심히 지내는 나를 차 태워가서 좋은 영화를 보게 해준 친구에게도 나란히 앉아 미사 드리고 오후엔 함께 걷던 시간들과 함께 고마움을 가집니다.

 

때때로 보면 누군가가 준 작은 정보가 아주 오랫동안 내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지요. 김장 비법처럼요.

"거실창을 발코니창으로 바꾼 건 정말 잘 한 거야."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 작은 정보를 준 사람이 고맙지요.

따뜻하고 효율적인 벽난로가 있음을 알고 우리도 따라서 놓을 수 있게 해주신 분도 겨울이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희호재 식구에겐 집밥처럼 안심하고 맛있게 먹는, 좀 특별한 인연을 지닌 동네 식당이 있지요.

덕분에 올봄 마당에 겨울난 상추가 마구 올라와서 감당이 안 될 때 한 상자씩 뜯어다 가져다 줄 수 있었고,

국수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이 여름 내내 구수한 콩국수를 맛있게 먹고,

6000원 짜리 된장찌개만 시켜도 밑반찬 접시들을 깨끗이 비우도록 하는 맛있는, 고마운 식당입니다.

 

누구보다도 남편과 아들이 제 삶의 가장 큰 힘이지만 그 귀하고 소소한 내용들은 혼자 맘속으로 되뇌입니다.

실내외를 드나들며 이쁜 짓을 하는 얄진이도, 내 현관문 여는 소리만 듣고도 들고 뛰는 랑이와 빈이도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지요.

이렇게 매달 글 쓰는 고민을 안겨준 바람재도, JTBC의 싱어게인도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노라면 오래 전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 생각나지요.

'인생은 독주가 아니라 합주입니다.

당신은 그 누구의 인생에 들어가서 멋진 연주를 해주고 계신가요?

또 당신의 인생에 들어와 멋진 연주를 해주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새해는 내 삶에 들어온 인연을 더더욱 소중히 여기고

나 또한 따뜻한 연주를 함께 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21년 첫달 초하루에 가을하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