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한 후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비가 오면 즐겁다는 것이다.
잔디를 심고, 나무를 심은 후엔 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 줄 알았으니 물 주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러니 비가 오면 저녁 시간이 여유로워진다.
꽃씨를 뿌리고, 모종을 옮기고 나서도 매일 물을 주는 우리를 보고 이웃에서 가르쳐 주었다.
물은 매일 주는 것이 아니다, 식물이 물에 치어서 도리어 죽는다.
가끔씩 흠뻑 주어야 한다. 찔끔찔끔, 신내따꼼씩 주면 오히려 흙만 딱딱해진다고...
우리가 아무리 흠뻑씩 준다고 주어도 하늘이 내리는 비에 대면 족탈불급이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자연에다가 맡겨두는 이유를 그래서 알게 되다.
올해는 물 주는 일에서 조금 자유로워졌지만 비가 오면 마당의 모든 것들이 파릇파릇해지는 것이 눈에 보여 덩달아 즐겁다.
비 맞는 단이를 안으로 옮겨 매어주고 학교로 오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비가 오면 운동장엔 유리궁전이 생겨난다.
아주 오래 전 20대, 30대일 때는 아이들이 짜투리 시간이 나면 곧잘 '첫사랑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하였다.
같이 근무했던 어떤 선생님은 공짜로는 안 돼! 했다가 아이들이 100원씩을 몽땅 거두어 주는 바람에 이야길 했다는 재밌는 경우도 있었다.
비 오는 날 이층 교실에서 그 유리궁전을 내려다 보다가 아이들에게 이끌려 이야기를 했었다.
"대학 2학년 때였거던....
월, 수, 금 첫 시간만 전공 수업이었는데 어느 비 오는 날 일찍 가서 창문가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목이 잠기는데 아이들은 재촉을 한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수업을 내내 빼먹었는지 3월이 다 가도록 한 번도 못 본 남학생이 한 명 들어오는거야.
교련복 모자에 교련복을 입은 채로 들어오는데 우산이 없었는지 비를 흠뻑 맞은 채로,
그런데 모자를 벗어서는 온몸의 비를 눈 털어내듯이 툭 툭 털어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수업을 받는거야.
그게 신기해서 그 다음부터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눈으로 찾게 되었단다.
그런데 도통 수업 시간엔 잘 볼 수가 없었어.... 교정의 잔디밭에서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하는 모습만 보이고
................
그러다 4월말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거야.
중간고사 공부는 해야 하는데 아는 건 없으니 같이 좀 할 수 없겠냐고,
나도 아는 게 없다고 했더니 내가 디기 착실하게 보였던지 그래도 줄이라도 쳐놓지 않았냐고,
도서관에 잡아놓은 자기 자리에 가서 공부하고 있으면 교련 수업을 마치고 오겠다고.
난 그 자리라는 곳이 그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들의 아지트인 줄도 모르고 가서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뒷사람들의 눈이 동그래졌을텐데도 나는 몰랐단다....
그런데 일 주일을 못 갔어. 왜냐하면 그 사람이 너무 불편했거던.
대학 가서 나는 남학생들을 여학생보다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만은 신경 쓰이고 그래서 불편했지.
나는 그런 내가 또 불편해서 4일인가 같이 공부하고는 친구 핑계대고 자취방으로 도망가 버렸단다.
그 어디쯤에서 마침종이 쳤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래서요?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되었어요?
응-----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있단다.
그럼 아이들은 책상을 치고 넘어갔다.
비가 오니 아주 오래 전 이야기가 생각나고 나는 이제 이 이야기를 열려있는 이 곳에다가도 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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