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부활 대축일이었다.
우리 신부님은 부활절 판공성사의 보속을 개별적으로 주시지 않고 성당 게시판에 붙여 놓으셨다.
그리곤 게시판에 공고된 다섯 가지 중에 세 가지를 하라고...
두 가지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어서 하더라도 마음이 담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남은 세 가지를 해야 했다.
성주간의 목, 금, 토 미사에 한 번 이상 참석할 것과 4월 반모임에 참석할 것! 이 두 가지는 그러잖아도 할려고 했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가 4월 중 교중미사 때 집에서 성당까지 걸어오라는 것이었다.
보는 순간에 끼약! 했지만... 하고 싶었다. 얼마나 걸릴까?
명리 집에서 나와 과학대를 거쳐 소밤다리 부근의 4차선 도로를 걸어서 경안중학교를 거쳐 성당까지 가면....
누군가에게 물었더니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 했다.
두 시간 반쯤 잡고 아침 8시에는 나서야지 했는데 무장하고 나서니 어느새 8시 반이 되었다.
사진 찍으러 나서면서 남편은 세 시간도 넘어 걸릴 것 같은데 오늘 꼭 할 거냐고 했다.
4월 마지막 주는 연합미사로 성당에 교중 미사가 없으므로 다음 주로 미룰 수도 없었다.
배낭에 미사에 필요한 것과 물 한 병을 넣고 나서다.
혹 미사에 늦을까봐 학가산 온천 앞에서 4차선 도로로 곧장 가려고 올라서 보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소밤다리 부근(돌아올 때 보니 여기도 길이 있었다)만 빼곤 소로인 옛길이 있었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시계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갔다.
신기하다. 마치 하느님이 시계를 천천히 돌리고 계시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1시간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사 후 돌아올 땐 누군가에게 태워 달라고 해야지 했었다.
두세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이고, 성당까지 걸어오기 라고 하셨으니,
돌아올 때는 걸어 오지 않아도 하느님이 봐주실 거야!라고 혼자 생각하다.
그런데 돌아올 때에도 걸어도 될 거리였다.
느긋하게 걸으면 얼마나 걸릴지 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돌아올 땐 아스팔트가 더워져서 등산화 안의 발가락이 후끈거리다.
오체투지를 하고 계시는 문규현 신부님, 수경 스님, 전종훈 신부님을 마음으로만 생각하다.
4월 날씨가 이러한데 6월까지 그렇게 하실 터이니....
봄 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새삼 보다.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서 지는 것 하나하나도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우리들 머리카락 수도 다 세시는 하느님이시니....
아무 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도 나는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만으로 나를 족친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내 잣대로 비판하고, 비난한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고, 별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냥 들판의 들꽃처럼 나서 피었다가 스러져도 아름다운 것을.....
걸을 때면 언제나 하는 생각이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지 않아도, 힘들게 거꾸로 매달리지 않고도,
그냥 걷는 것만으로 사람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키작은 들꽃들도 보고, 식물원도 기웃거리고, 아이스크림도 사먹다.
그러고도 집에 오니 1시간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에 너무나 익숙해진 채로 늘 바쁜 마음으로 살고 있는 나를 잠시 비껴서서 보았다.
한 발 한 발 걷는 걸음으로 얼마나 많이 갈 수 있는지를 조금 배운 귀한 하루였다.
그래서 보속은 다시 축복이 됨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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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면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봐 겁난다.
그 날 미사 시간에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설문지가 있었는데 답을 하다가 창피해서 낼 수가 없었다.
주일날 미사 한 번 참석하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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