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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어느 일요일 새벽에 주산지 찍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저녁형인 우리 둘 다 새벽에 무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래도 어쨌던 늦가을 추운 새벽에 일어나 주산지를 갔습니다.
주산지로 들어서는 도로 초입부터 온통 차들이 빽빽했지만 영문을 몰랐습니다.
결국 주산지 주차장까지 올라가서야 그 수많은 차들이 찍사들을 실어온 차인 것을 알았습니다.
거꾸로 내려오다 겨우 작은 공간에 차를 대고서는 평생 서두르는 일이 없는 사람이
빨리 빨리!를 연발하며 달려 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추위에는 잼병인 저는 파카 꺼내입고 삼각대 들고 뒤따라갔는데 이미 물안개가 다 걷히고 난 뒤였지요.
그제서야 남편은 손가락에 피가 흐르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계곡으로 미끄러질 뻔하면서 급하게 차문을 닫느라 손가락이 차문에 찡겼는데도 새로 닫고는 그냥 들고 뛰었다는 거지요.
재미있는 건 그 날 찍사들을 싣고 온 대형버스를 보면서
남편 왈 ‘만약 저 버스가 구르면 저 안에 들어있는 카메라 장비값이 얼마가 될까?’ 했다는 것입니다.
웃었지만 지금 이 남자의 생각 속에는 카메라만 들어 있구나 싶었지요.
다음 주 일요일 새벽에나 가겠거니 했는데 웬걸 그 다음 날부터 아침 출근을 한 시간 반 정도 빨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새벽에, 결혼 후 처음으로 깨워주지 않아도 혼자 일어나 생식 먹고 가는 거지요.
학교 가는 길에 주산지 들러 사진 찍고 학교 가기를 글쎄요.... 백 번도 더 했을 겁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주산지 모습을 찍어 왔지요.
덕분에 저는 주산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대기의 온도에 따라 카메라에 잡히는 사물들의 색깔이 얼마나 다른지도 알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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