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입니다.
5월엔 찔레꽃 향기가 온 산에 가득했습니다.
때죽나무, 산딸나무, 이팝나무, 아카시아가 모두 하얀 꽃들을 가득 달고 있었지요.
마당에선 양귀비와 수레국화, 샤스타데이지, 패랭이, 분홍낮달맞이 등이 한창입니다.
그리고 저녁나절 물을 주고 풀을 뽑고 할 때면 해당화와 붉은인동초의 행복한 향기가 코끝에 와 닿지요.
집을 지어 이사 온 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웃해서 사는 어르신들이 하루가 다르게 나이 드시는 게 보입니다.
며칠 전 걷고 들어오다가 그늘에서 동네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저희 집에서 길과 밭 하나 건너에 두 어른이 살고 계시지요.
영감님은 저만큼 멀찍이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느린 걸음을 걷고 계셨습니다.
“어르신 기력이 자꾸 떨어지시네요.” 했더니, 생각지 않은 말들이 돌아왔습니다.
“아이구, 고마 갔으면 좋겠니더! 혼자면 부섴(부엌)에서 한 술 뜨고 말면 되는데 삼시 세끼 상 차려 들고 들어가야 되지, 반찬도 한 가지쓱은 더 해야 되지.
인자는 밥하는 게 귀찮아. 자슥들이 왔다갔는데 난도 힘드니 영감을 어데 좀 보내든지 하라 캐도 저래 아무 데도 안 갈라카이. 저래도 안즉 나한테는 까꾸랑해 가지고 못되게 카니더.”
다리가 아프셔서 오래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할머니의 말씀은 농담이 아니었지요.
평소에 말씀이 많은 분도 아닌데 그리 말씀하시니 제 마음이 짠했습니다.
영감님은 정갈하고 꼿꼿한 어른이신데 아마도 마나님에게는 따뜻한 분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란히 걷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 젊은 날에도 두 분이 길을 가면 영감님은 늘 2미터 쯤 앞서서 가셨지요.
그 연세에서는 그리 덤덤하게 살아오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평생을 부부로 살면서 말이라도 따뜻이 해주고 살갑게 대했다면 앓아누워 병수발을 하는 것도 아닌데 “고마 갔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텐데 싶었습니다.
반면 저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옆집의 두 분이 사는 모습은 또 다르지요.
저희가 이사 온 다음 해에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한쪽 수족을 못 쓰게 되셨는데, 그 후로 영감님은 적지도 않은 농사와 수십 마리 소를 키우는 축사일 외에도 집안일, 할머니 뒷수발까지 다 하시지요. 일의 양이 상상이 안 갈 정도이지만 전혀 바쁜 기색이 없는 영감님에겐 할머니가 그렇게라도 옆에 계시는 것이 더 나은 일임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답니다.
말문이 막히신 할머니는 ‘그래, 아니.’ 등의 몇 마디 밖에 못 하시고, 영감님은 귀가 어두워 자잘한 대화는 안 되지만 그래도 두 분이 서로에게 고함치듯 하는 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담 너머 들려옵니다.
“아지매, 아지매!” (할머니가 처음 병원에서 간병인을 향해 내뱉았을 이 말이 영감님을 부를 때 쓰는 유일한 호칭이지요.)
“와? 왜? 머 강아지 물 없다꼬?”
“오야! 알았다. 내 주꾸마!”
우연히 들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중에 이런 게 있었지요.
누가 매달 나한테 100만원씩 보시를 하겠다고 하면 얼마나 고맙겠냐고?
근데 1년쯤 지나면 당연한 게 되고 3년쯤 지나면 아직도 100만원이가? 그런다고..
부부 사이도 그렇다고...
저도 점점 밥하는 게 귀찮아져서 밥 차려놓고 가끔 생색을 내지요.
매끼마다 뭔가를 해서 맛있게 먹도록 한다는 건 정말 신기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얼마 전 남편이 넌지시 그랬습니다.
당신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고 얼마나 애써 보았냐고?
이게 이러면 참 편할 거 같은데... 라고 지나가듯 한 말에 그 안 되는 걸 오전 내내 주물딱거려 고쳐 놓았는데 제 반응이 시원찮았나 봅니다.
사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당연히 남편이 하는 거라고, 또 그건 이 사람이니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해 버리지요.
평생을 한 공간 안에서 사는 고마운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따뜻하게 대하는지,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메세지를 얼만큼 주고 받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스스로는 참 대단하다고 여기는, 또 대단한 면을 얼마나 서로 알아주고 칭찬해주고 있는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외로운 말씀이...
어제 오후에도 들어오다 보니 할머니는 마당 뜨럭에 앉아 계시고 영감님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애써 걷고 계셨지요.
그 속속들이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두 분 모습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삶도 그러하겠지만...
여름의 시작입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여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2020년 6월 초하루에 가을하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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