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쓰는 글

[스크랩]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 어머니!

가 을 하늘 2011. 9. 5. 22:20

(여기 올리는 게 맞지 않지만.....)

 

이소선 여사님께서 지난 3일 오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전태일 - 이소선 - 조영래

세 사람의 이름은 뗄 수가 없지요.

언제인가 댓글 속에서 조영래 변호사님 이름을 말하니

모르는 분이 계셔서 난중에 이야기해 드릴게요. 하고는 지나갔지요.

그런데 지난 토요일 이소선 여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기사를 읽고는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써야지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로 시작되는

마지막 유서가 된 전태일의 시를 읽으면

지금도 목이 아파 오지요.


1960년대말 청계천의 평화시장 봉재공장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지요.

최저 임금도, 노동 시간도, 노동 최저 나이 같은 개념도 전혀 없는 시대에

전태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곳에서 일을 하였지요.

미싱공이 되는 게 고작 꿈인 그 또래들 사이에서

10대 후반의 전태일은 각혈을 토하며 일하는 어린 여직공들과

부당한 노동 조건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눈 뜨게 되고,

그러다 노동3권을 알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에게도 단결하고, 단체 교섭을 벌이고, 단체 행동을 할 수 있는

법적인 당당한 권리가 있음을....

그 권리가 있음을 알고 하늘을 날듯이 기뻐했던 그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그 권리가 지켜지게 하기 위해 해당 관청을 쫓아 다니고 했지요.

 

그러다 그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해당 관청이란 곳은 알면서도 눈감고 있을 뿐임을

세상은 그 부당한 것들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된 그는

20살이었던 1970년 11월에 그 노동자들 앞에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고는

분신 자살을 하지요.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병원에 실려가서 온몸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8시간을 버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에게 그는

몸 속까지 불길이 꽉 찬 고통 속에서도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란 말을 남기지요.


그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그때까지 일자무식의 보통 어머니였습니다.

홍수에 떠내려 오는 무말랭이를 건져 반찬을 만들어 팔 정도로 가난했던,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 바빴던 보통 어머니요.

그런데 아들을 그렇게 떠나 보낸 이소선 여사는 그때부터

아들이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 눈떠 갔지요.


그 이후로 41년의 세월을 거리에서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습니다.

노동자들이 부당한 고용주와 부당한 제도와 맞서 싸울 때마다

앞장 서서 싸웠습니다.

그런 싸움에서 자식과 형제를 잃은 가족들을 돕고 서로 힘이 되기 위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만들어 이끌어 오셨지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 단체 중에서 경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라고 하지요.

자식을, 남편을 잃고 제도적인 문제에 눈 뜬 사람들보다 더 용감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전태일을 정작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은 조영래 변호사님입니다.

서울대에 수석합격까지 한 조영래 변호사는 재학 중 이미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사시합격 후 연수원 재직 때부터 구속, 수배의 생활을 하였지요.

그 과정에서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알게 된 그는

수배 생활 과정에서 이소선 여사를 만나

전태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온전히 알게 되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후에는 - 전태일 평전)’을 쓰게 되었지요.

책이 처음 출판된 건 1983년이었는데

그 때에는 저자의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익명으로 펴내었다지요.


그 분은 부천 경찰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을 변호하는 등

많은 일들을 했고, 또 해야 할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

1990년 44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쓴 ‘전태일 평전’처럼 지금은 ‘조영래 평전’이 나와 있지요.


그런데 그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조영래 변호사가 생전에 어머니로 모셨던 이소선 여사께서

이제 여든 한 살의 나이로 두 아들을 만날 수 있는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들을 만나면

그때와 지금이 그닥 달라진 것이 없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것이 걱정이라고 하셨다지요.


(이 글을 쓸 자격을 따진다면 그 자격은 제게 없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분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래서 쓰고 싶었습니다.)


명복을 빈다는 말도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출처 : 바람재 들꽃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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