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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읽고

가 을 하늘 2021. 2. 17. 23:14

‘진보와 빈곤’을 읽고 지난 1월에 쓴 글을 옮겨오다.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으나 알릴레오 북스에서 다루어서 읽게 되다.

무엇보다 저자에 대해 유시민은 성자라는 표현을 하며 그 내용만이 아니라 저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문장들에서도 감탄하며 소개하였다.

또 19세기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도 했다.

600 쪽에 달하는 책이어서 읽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헨리 조지 자신이 독자를 설득하고자 쓴 책이어서 내용은 어렵지 않았고 논리정연하였다.

깨알재미가 있는 건 아니어서 조금의 인내심은 필요했다.

 

지금부터 160년 전에 씌어진 책이다.

산업혁명 후 아마 누구나 물질문명이 그렇게 발전하면 인류에겐 가난이란 게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기계와 동력이 나오고 대량생산이 가능했으니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인류 전체의 삶이 향상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21세기인 지금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더구나 그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은 저개발 국가나 한적한 시골이나 바닷가에 있는 게 아니라

가장 발전한 나라, 번화한 도시에 너무나 많다.

그는 이 문제를 진심으로 고민했고, 그 이유를 찾아내었고, 그리고 그 해결책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쓰고나서 그가 울었다고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너무나 조단조단하게 하나하나 실례를 다 들어가며 설명하고 설득하고 비젼을 제시한다.

그가 볼 때에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하면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없어지고

인류는 다함께 제대로 발전하고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정치경제학에서 멜더스의 인구론(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이 옳지 않을 뿐더러 부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다. 그의 말을 듣고보면 ‘인구는...’ 이란 이론은 정말 엉터리이며 가진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도 양심에 안 찔리게 해주는,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말로 쓰이고 있음에도 1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살아 있다니...

 

생산의 3요소인 토지, 자본, 노동 중에서 토지는 수고없이 이익을 보고 있음에도 점점 더 많은 몫을 가져가서 생산력이 증가해도 자본과 노동, 특히 노동은 오히려 임금이 줄기까지 한다. 그래서 상대적 빈곤을 비롯하여 노동자들은 더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가 토지에 따른 즉 지대에 따른 세금만 제대로 거두면 다른 모든 세금은 다 없애도 국가 경영이 가능하다.

내가 책을 읽으며 놓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지대에 따른 세금만 거두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고 하는 것인지는 이해를 잘 못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서술하는 그 구체성과 논리를 볼 때 분명 그 방법도 제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도 쉽지 않다고 했다.

누구나 제대로 생각해 보면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저항도 있고, 제도를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무 수고를 않고도 가장 많은 이익을 그것도 거의 착취에 해당하는 지대를 가지고 가는 것은 옳지 않고 이것을 그냥 방치하면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해도 오히려 그 다수의 선택에 의해서 독재자보다 더한 지도자가 선출될 수도 있다고...

절대 빈곤 앞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학교도 많이 안 다닌 그가 스스로 공부해서 인류의 이 ‘가난’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부당함을 고발하고 그 구체적 대안까지 제시한 19세기의 성자인 헨리 조지를 이렇게 만나다.

코로나 이후 인류는 지구환경 문제와 빈부 격차의 문제 이 두 가지는 어떻게든 바꾸어 나가야 할 문제이다.

‘침묵의 봄’에서 옮긴이가 말했듯이 전세계 인류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동시에 크게 깨우쳐서 일체의 환경오염 행위를 중지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올해 역시 ‘침묵의 봄’이 계속될 것이라고...

그 기적이 인류가 가난한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