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여고에 있을 때 2년 정도 연극반 지도교사를 맡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연극반을 열정적으로 이끌던 선생님이 떠난 후에 아이들에겐 바람막이가 필요했지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한다는 건 늘 눈총거리였으니까요.
그래서 연극의 '연'자도 모르면서도 아이들의 요청에 의해 맡았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탄탄해져서 지도교사가 무식해도 기수별로 선배가 후배를 잘 지도하여 학교 축제 때는 매년 무대에 올렸지요.
전 그때 늦은 밤까지 연습하는 아이들 곁에 가끔씩 있어주거나 떡볶이를 사주는 것이 고작이었을 뿐 오히려 제가 많이 배웠지요.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 - 감독의 역할과 배역 선정과 무대 장치와 음향과 조명과 의상과 마지막 분장(믿을 수 없게도 몇 시간에 걸쳐 분장을 하지요 - 이 어떤 것인지,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어떻게 그렇게 울 수 있는지도, 몰입이 어떤 건지도요.
떠나오는 마지막 해엔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있었지요.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을 건져주는 잠수부가 주인공이었는데
죽은 사람을 놓고 가족들이 유산 분배와 관련한 유서를 찾느라 온갖 추악한 모습들을 보여 주지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돈에 환멸을 느낀 잠수부가 돈다발을 무대 위에서 뿌리는 것이었답니다.
공연 바로 전날 밤 1시가 넘도록 그 놈의 돈을 A4용지에 그리느라 낑낑 대고 있는 것이 안스러워서 내가 돈을 만들어 주기로 했지요.
밤 두 시가 넘어 집에 와서 ㄴㅁㄲ에게 만원 짜리를 스캔해 달라고 해서 3,40장 정도를 프린트로 찍었지요.
정말 다행인 건 뒷면을 앞면과 가로세로 맞추고 할려니 밤이 너무 늦어 앞면만 했습니다.
그리고 연극도 잘 끝나고 분장한 아이들은 눈물 범벅이 되기도 하고.... 저는 다음날 출장을 갔었지요.
문제는 연극을 보러 온 옆 학교 남학생들과 시민회관 청소 아주머니가 그 가짜돈을 주워 가서는 장난으로 쓰는 바람에 신고가 들어 갔지요.
경찰관이 내가 없는 학교를 와서는 조사를 해가고.... 그 다음날 나는 염려가 되어 전화로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경찰관 왈 '위조지폐범이 딴 거냐? 돈을 똑같은 크기로 인쇄를 하면 그게 위조지폐범이지, 일의 사정은 이해한다. 다행히 아무도 사용을 안 한다면 그냥 넘어가지만 만약 그 돈을 누군가가 유통을 시킨다면 찍어낸 당신이 바로 위조지폐범으로 걸린다.... 등등'
일 주일 정도 간을 졸이고 살았는데 남 속도 모르고 옆에서들 얼마나 놀리고 웃기는지.... 일 주일이 한 달도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별일없이 지나가고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남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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