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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수필'을 읽고

가 을 하늘 2021. 11. 30. 22:23

(8월 독서모임에서 읽고 쓴 글을 이제 옮겨오다.)

 

어느 날 멀리 있는 친구가 내게 이 책을 권하다.

권하기만 한 게 아니라 지난 번 만날 때 빌려주려고 들고 오다.

덕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돌려주고 쉬엄쉬엄 편하게 읽다.

 

책을 펼쳤는데 목차만 보았을 때는 그닥 맘에 들지 않았다.

두세 쪽의 너무나 짧은 글들이 잔뜩 들어있어서이다.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거나 무언가를 깊고 진득하게 다룬 책들을 읽다보니 수필이란 생각을 잠시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책 바깥 뒷표지에 인용되어 있는 저자의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란 글과

앞서 친구가 읽다가 톡으로 보내온 구절 덕분에 잠시의 느낌을 던져두고 책을 펼치다.

저자는 글을 쓰는 이유를 ‘내가 추는 시간의 춤이어서, 허무에 대항하는 내 삶의 양식이어서’라고도 하고,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매다는 푸나무만도 못한 인간의 영혼, 그 쓸쓸함을 편드는 일’이라고도 하다. 존재에 대한 그 표현이 마음에 와닿다.

 

읽으며 친구들과 남편에게도 카톡으로든 말로든 옮겼던 게 몇 개 있다.

그러고 싶을 만큼 저자의 은유와 표현은 기막혔다.

삶에서 만나는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독특한 생각들을 하고 그걸 어찌나 잘 표현하는지...

소소하게 스쳐가는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붙들고 생각해서 그때그때 적었을,

아마 그래서 손바닥 수필이라고 했나 보다. 마치 귀에 연필을 꽂고 있다가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고 귀 뒤에서 연필을 뽑아 바로바로 적었을 듯한...

 

읽다가 어느 순간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란 말을 떠올리다.

저자는 삶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 하나하나에 대해 사유하고 이름과 의미를 붙이고 있다.

사람마저도 ‘나와 그것’으로 대하는 세상에서 조용조용 그렇게 깊이 바라보는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다. 오래 전 ‘나와 너’를 알았을 때 가졌던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 살고 있는 나를 다시 되돌아 보았다.

사람도, 개와 고양이도, 연필도, 책도...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나는 얼만큼의 크기로 대하고 있는지....

그 부분에서 나를 다시 추스르게 해준 최민자씨와 책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가지다.

 

- (p.41) 땅끝마을 지붕 위 초록별들이 불을 켠다. (발톱에 초록색 페디큐어를 바른 후의 묘사)

- (p.49) 괘종시계가 대청마루에서 터주대감 노릇을 할 때만 해도 (정말 그럴 때가 있었다. 너나없이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유리문도 없는 마루 벽에 커다란 시계불알을 단 괘종시계를 걸어놓고 살던...)

- (p.52) 춤이 별거야? 네 안 깊은 곳에 갇혀 사는 신명에게 바람 한 번 시원하게 쏘여주는 일이야.

- (59쪽) 배꼽 - 세상 밖으로 내치는 순간, 간절한 마음으로 눌러 찍은 신의 마지막 무인(도장 대신 손가락에 인주 묻혀 그 지문을 찍은 것) 같은 게 아닐까. ‘메이드 인 헤븐’에 불량품은 없을 터, .... 우리 모두, 까다로운 검품과정을 너끈히 통과해 낸 천상의 특제품들이라는 사실은.

- (64쪽) 물길과 사람길이 다정하게 휘어간다.

- (87쪽) 글쓰는 일을 - 필사의 육신 안에 갇혀 사는 어리보기 정령 하나가 절박하게 SOS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아서...

- (123쪽) 귀 - 덤불숲 언저리에 조용히 비켜 있다.

- (130쪽) 죽의 말씀 - 칼로 두부 긋듯 매사 야멸차게 나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법이라고, 그대가 먼저 풀어지고 허물어져야 남의 속도 편안하게 풀어줄 수 있다고

- (144쪽) 달을 풍덩 빠트려놓고 무엇을 또 옮기려 갔는지 기중기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산자가 죽은 자를 네트워킹하는, 달은 가장 오래된 서버, 눈으로 클릭하는 첨단의 윈도우이다.

- (176쪽) 비와 눈에 대하여 - 울며불며 바닥을 기는 비...

- (184쪽) - 가을이 사라졌다. 은행잎, 단풍잎 다 털어먹더니 야반도주를 해버린 것 같다.

- (218쪽) - 물자와 정보의 빈번한 출입으로 칠이 벗겨진 나들목에 도색 작업을 하려는 거야.

- (230쪽) - 생각날 때 고개를 넘어 달려가 안겨야 애인이지, 같이 살면 마누라가 되어 버리잖아요. .... 돛을 달고 왔다가 닻을 내리면 덫이 되어버리는 게 인생...

 

- (243쪽) - 술 취한 사람이 소방호스를 사방팔방으로 휘둘려대듯 종잡을 수 없는 빗줄기...

바다는 왜 항상 성이 나 있을까? 이 행성의 이름이 수구(水球)가 아닌 지구(地球)여서일까?

 

그리고 그(녀)의 책엔 예쁜 우리말이 많이 나온다. 찾아가며 적어가며 읽느라 이 작은 수필집을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다.

 

바장이다 :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락가락 거닐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머뭇머뭇하다.

모숨 : 한 줌 안에 들어올 만한 분량의 길고 가느다란 물건 또는 그것을 세는 단위

자밤 : 나물이나 양념 따위를 손가락을 모아서 그 끝으로 잡을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

옹송그리다 : 춥거나 무서움에 몸을 웅크리는 것

연리지 :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

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든 잠

소소리바람 : 회오리바람을 일컫는 전라북도 산간지방(무주, 장수)의 말.

겨울에 부는 살 속을 파고드는 찬바람

적바림하다 :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글로 간단히 적어두다 / 적바림해 둔 글귀들

스적스적 : 물건이 서로 맛닿아 자꾸 비벼지는 소리 또는 그 모양

쓰레질을 대강대강 하는 모양

거스러미 : 손발톱 뒤의 살 껍질이나 나무의 결 따위가 얇게 터져 일어난 부분

생게망게하다 : 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다

도린곁 : 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

매욱하다 : 하는 짓이나 됨됨이가 어리석고 둔하다

곰비임비 : 물건이 계속 쌓이거나 일이 계속 일어남을 표현

삽상하다 :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 삽상한 바람

시난고난 : 병이 심하지는 않으면서 오래 앓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