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하루꽃편지 - 약해지지 마
2월입니다.
설은 잘 쇠셨나요?
동지도 지나고 설도 지났으니 우리 모두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었지요.
어느덧 제 나이도 꽤 많아졌습니다.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신, 그러기엔 너무나 이른 그 40대의 후반도 지나고,
첫 발령지에서 만났던 50대 여교사들의 그 대단하고 까마득해 보였던 나이도 훌쩍 넘어
이제 할머니와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나이가 저만치 앞에 보이지요.
주변을 돌아보면 제 나이 대의 퇴직한 지인들이 8,90대 노부모님의 병수발을 드는 경우를 쉬이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문상을 가보면 돌아가신 분의 연세가 아흔을 넘긴 경우가 흔하지요.
동네를 걷다보면 할매들이 이른 점심을 드신 후 유모차를 앞세워 노인정으로 나가셨다가
해거름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는 모습들도 흔히 보게 됩니다.
그 중의 한 분이 얼마 전 저를 붙들고 이러셔서 웃었지요.
“나(이)가 들면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라 캤는데 나가 말이 이쿠 많아지니 우야면 좋겠니껴?”
고령화 사회는 이미 왔고, 그래서 오래 사는 것보다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또 몸 못지않게 약해질 우리들 마음과 정신도 되도록 따뜻함과 꼿꼿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더구나 나이 들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또는 느리지만 한걸음씩 자신을 발전시켜 가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래 전 바람재의 시문학방에 제4막님이 우리나라의 오금자 할머니의 시 ‘숲속의 아침’을 올려 주셨습니다.
오금자 할머니는 82세에 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90대에 생애 첫 시집을 내었다고 하지요.
그 글에서 일본에는 시바타 도요라는 분이 있다고...
도서관에서 그 분의 시집을 빌려와 읽었습니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92세에 시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해 99세가 되던 2010년 첫 시집을 펴내고, 이듬해인 2011년엔 백세를 기념한 두 번째 시집 '百歲'를 출판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지요.
시집 출판 2년 뒤인 2013년 1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니, 우리 나이로 103세까지의 그 삶은 마지막까지도 아름다운 불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겠지요.
20대에 결혼과 이혼(1930년대에 어떻게 이혼을 했을지...), 33세에 재혼하여 외아들을 얻었고 재봉일 등의 부업을 하며 열심히 살다가 1992년 남편과 사별, 그 후 20년 가까이를 홀로 사셨고, 90을 넘기면서 거동도 조금씩 불편해졌다고 하니 그 세대가 겪었을 질곡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아흔도 훨 넘긴 나이에 시인인 아들이 습작을 권해서 쓰기 시작한 시 가운데 한 편을 일간지에 투고하여 놀랍게도 6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산케이 신문’ 1면에 실렸다고 합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평생 문학 수업 한 번 받지 못한 노인의 글이었지만, 솔직 담백한 할머니의 시에 심사위원들이 끌렸던 것이지요.
도요의 첫 시집에 실린 시들은 2011년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로 모두가 침울해 있을 때 일본인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우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도요는 자신의 장례비용에 쓰려고 모아둔 돈으로 시집을 출판하였는데, 이 시집이 당시 일본 열도를 감동시키면서 150만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지요.
시바타 도요도 나이 먹을수록 외롭고 우울해져 몸도 마음도 다 약해지긴 했지만 시를 통해 용기가 생기고 나약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삶의 지혜와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 출판된 시바타 도요의 첫 시집 ‘약해지지 마’에 실린 시 몇 편을 옮깁니다.
<약해지지 마>
저기, 불행하다며 한숨 쉬지 마.
돈 있고 권력 있고
그럴 듯해 보여도
외롭고 힘들긴 다 마찬가지야.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 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바람과 햇살과 나>
바람이
유리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 주었지
그랬더니
햇살까지 들어와
셋이서 수다를 떠네
할머니
혼자서 외롭지 않아?
바람과 햇살이 묻기에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
나는 대답했어
그만 고집부리고
편히 가자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 오후
<추억 Ⅱ>
아이와 손을 잡고
당신의 귀가를
기다리던 역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죠
셋이서 돌아오는 골목길에는
달콤한 물푸레나무 향기
어느 집에선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노래
그 역의 그 골목길은
지금도 잘
있을까
<살아갈 힘>이란 시에서는 이렇게도 노래하지요.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오는 안부전화....
평균 수명으로 치자면 아직 제게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닥 욕심내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2020년 2월 초하루에 가을하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