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삶을 담은, 오래된 책 두 권!
금요일자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아주 작은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김홍섭 판사님'
오래 전 책을 통해 그분의 삶에 감동받았었는데 아직도 그 분을 기억하는 자리가 있음이 고마웠습니다.
1965년에 세상을 떠난 그 분의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가 누런 갱지를 사용한, 30년도 넘은 때묻은 모습으로
제 책꽂이에 있어 펴보니 다시 눈물겨웠습니다.
<다음은 지난 3월13일자 한겨레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
18일까지 서울고등법원 청사에서 김홍섭 회고전...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법관'으로 손꼽히는 김홍섭(1915-65) 전 서울고법원장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서울고법은 12~18일 청사 1층 대회의실 앞에서 고인이 법관 시절 사형수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시, 그림, 법복 등을 전시하는 '김홍섭 회고전'을 연다. 고인의 50주기인 16일에는 추념식도 연다.
고인은 판사 시절 피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 재판장으로 유명했다.
구치소를 찾아가 사형수를 면하거나 그들의 무덤을 찾아 기도를 했다.
천주교신자였던 그에게 감화받아 세례를 받은 피고인도 여럿이다.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을 암살 교사한 혐의로 사형당한 허태영 육군 대령과 서울고법 부장 판사 시절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대부를 맡기도 했다.
그런 고인에게 장면 전 총리는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도 법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고인은 청빈한 삶으로도 존경을 받았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일할 때까지 10년가량 군 작업복 바지에 장인에게 물려받은 양복저고리를 입고 도시락과 법전을 옆구리에 낀 채 출근하던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도시락 판사’라고 불렀다.
1960년대 초 고위직 공무원 부인들이 관용차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문제가 불거지자 한 법조 전문지에 “대법관만이라도 호화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일을 스스로 삼가야 한다”는 글을 기고해 법조계에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일제 말기 변호사로 생활하다 해방 뒤 판사로 임용된 고인은 서울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광주고법원장을 거쳤으며, 서울고법원장이던 1965년 간암으로 별세했다. (김선식 기자)
<무상을 넘어서>와 같이 보여드리고 싶은 책이 한 권 더 있습니다.
김흥겸(흥할수록 겸손하라는 의미라고...)씨의 수필집 <낙골연가>입니다.
지난 1월 어느날 연세대 동문인 어진내님이 카톡에 꽃바구니 보내었다고 올린 글 때문에 기억해 낸 책입니다. 책 표지의 말기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사진을 보니 그 책을 읽으며 받았던 그 절절함이 그대로 떠올랐지요.
연세대 신학과를 나와 달동네에서 빈민운동가로 짧은 생을 살다간 그를 말해줄 글을 한겨레 신문 기사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옮깁니다.
<한겨레 2007년 2월의 기사임>
서울 관악구 신림7동 일대는 '난곡'이라 불린다. 1960년대 이래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곳이다.
유배된 장군이 난초를 많이 길러 '난곡'이라 했다는데, 도시 빈민들은 '낙골'이라 불렀단.
뼈들이 흩어진 마을이라는 스산한 뜻이다.
비탈진 달동네 꼭대기에는 '낙골 교회'가 있었다.
97년 1월 서른여섯 나이에 위암으로 스러진 빈민운동가 고 김흥겸씨가 몸 담았던 곳이다.
13일(2007년 2월) 저녁 연세대학교 신학과에는 그를 사랑하는 친우 100여명이 모였다.
81학번이었던 그의 10주기 추모식인데, 친구들이 지난 해부터 행사를 준비했다.
<낙골연가>라는 그의 유고집은 이번에 <아주 특별한 배웅.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교정에 모여든 친구, 낙골 주민, 철거민협의회 사람들이 하나둘 그에 대한 기억을 털어놨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대학 동기는 <김흥겸, 김해철>이란 제목으로 짧은 영화를 상영했다.
김해철은 그가 쓰던 가명인데 '철거민 해방'이란 뜻이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가엾은 하나님..........."
가수 안치환씨가 불렀던 노래 <민중의 아버지>는 그가 대학 시절 만든 노래다.
민중신학을 공부했던 그는 졸업 뒤 낙골교회로 갔다. 노동현장에도 뛰어들었고, 서울시철거민협의회에서 주로 일했다.
농산물 직거래 등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그는 95년 서른 네 살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이듬해 11월 살아있을 때 장례식을 하고 싶다는 뜻에 따라 사랑하는 친구, 지인들이 모여 이별의식을 치른 뒤 97년 1월말 눈을 감았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학 시절 후배이자 그의 아내인 한지원(42)씨와 고등학생이 되는 딸 김봄(16)양이 참석했다.
"남편의 기일이 돌아올 때면 '이 사람이 참 잘 살다가 갔구나'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지인과 친구들 20여명이 충남 한산의 남편 묘소를 늘 찾아줬어요.
'보이지 않는다고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요. 남편을 생각할 때도, 달동네 난곡을 생각할 때도 떠올리는 말입니다." (2007년 2월 정세라 기자)
국무총리 자리에 앉힐 단 한 사람도 흠결없는 사람이긴 커녕,
보통 사람들은 하지도 못할 짓을 했음에도 눈감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정치 현실에서
이렇게 무상을 넘어, 다른 이들을 위해 살다가 떠난 사람이 있음을 다시 기억했으면 합니다.
